수안 008
우산을 들고 빗 속을 걷고 있는데 문득 오른발이 축축해짐을 느낀다. 왜 오른발이 먼저 젖는걸까 순간 생각을 하며 문득 보니 우산은 오른손에 들려 있다. 이상하다. 혹시나 하고 이번엔 왼손으로 우산을 들고 걸어보았다. 한참을 걷다보니 이럴수가 이번엔 왼 발이 축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산의 위치와 방향을 다시 봐도 이해가 안된다. 오른손으로 들면 당연히 오른쪽에 위치한 발이 비를 덜 맞아야 하고 마찬가지로 왼손으로 우산을 받치면 왼발이 비를 덜 맞아야 하는게 당연한게 아닌가. 별 것 아닌 이 일이 한 동안 머리속에서 나와 함께 걷는다. 설마. 나도 모르게 내 손이 상대편의 발을 배려하고 있는 것인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같은 내 몸인 오른손과 왼손을 나는 어느새 편을 갈라 놓고 있었단 말인가? 좌우 진영의 논리를 내 몸에도 의식하고 있었단 말도 안되는 소리라니. 아무튼 그렇다고 치면 내 몸의 가운데를 놓고 갈라진 오른손과 오른발은 같은 편일 것이며 오른손은 왼손과 왼발 보다는 오른발과 가까운 사이이며 오른발의 편의를 더 챙겨야 마땅하거늘 글쎄 오른손이 왼발이 비를 맞지 않게 우산을 조종한 것이다.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다가 또 하나 깨닫게 된다. 내 몸이 내 머리보다 낫다는.
오랜만에 장대같은 비 속을 걷는다. 우산 밑이 무척 소란스럽다.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네 생각을 한다. 딴 생각을 하려 해도 자꾸만 네 생각이 난다. 그런데 오늘따라 너와 좋았던 기억보다 그렇지 못 한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 기억은 결국 아빠를 다시 반성하게 만들어 주기에 좋은 선생이 된다. 그 때 그 상황에 아빠가 더 참았으면, 더 믿고 기다렸으면 하는 후회 들. 그리고 다시 생각하기도 부끄러운 행동들을 했던 기억들이 이 빗소리로 고함치며 아빠를 꾸짖는다. 아니 가르친다. 그래 이렇게 돌아보면 더 잘 할 수 있었던 일들이었는데. 후회와 반성을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각오와 다짐으로 이끌어 내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된다.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반성과 더 나은 아빠가 되겠다는 각오를 하루하루 일과로 잘 새길 것이다. 하물며 오른손도 왼발을 먼저 챙기고 아껴주는데. 수안이를 더 많이 믿고, 기다리고, 사랑하지 못 해 부끄럽다.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안타까운데. 다시 우리가 함께 있을 때는 다음에 후회하지 않도록 더 많이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