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필사> 밤이 깊어도 걸어갈 수 있다면

mosinig 2023. 4. 24. 21:40

......

     캐서린 맨스필드는 뉴질랜드 태생이지만 영국에서 주로 활동해온 작가다. D.H. 로런스와 버지니아 울프 같은 당대의 작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근사한 작품들을 썼던 캐서린 맨스필드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은, 어쩌면 그녀가 서른다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맨스필드의 작품은 <가든파티>라는 단편이다. <가든파티>는 캐서린 맨스필드가 생에 마지막으로 쓴 동명의 소설집에 실려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로라와 그녀의 가족은 가든파티 준비로 분주하다. '가든파티'라는 단어를 가만히 발음해보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수백 송이의 장미가 만발해 있고 푸른 잔디마저 반짝이는 더없이 완벽한 날에 정원 한가운데 차려진 티파티 테이블이다. 하얀 테입ㄹ보가 깔리고 3층으로 이뤄진 은식기 위에 샌드위치와 머랭 쉘 같은 것이 올라가 있는 근사한 티 테이블. 파티를 기다리는 로라의 마음은 파티를 위해 주문한 유명 제과점의 달콤한 슈크림빵처럼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아랫동네에 사는 짐꾼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들뜬 로라의 마음에는 어둠이 드리워진다. 누군가가 불행을 겪고 있는데 파티를 예정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로라의 마음에 싹터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니와 엄마는 그런 로라의 생각이 어처구니없다며 비웃는다. 그리고 예정대로 열린 가든파티가 성공적으로 끝이 났을 때, 엄마는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딸에게 파티에 쓰고 남은 음식들을 남편을 잃은 "불쌍한" 여자에게 가져다주라고 말한다. 로라는 남은 음식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음식을 갖고 가난한 동네에 조문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은 이의 얼굴을 보게 된다.

 

     <가든파티>는 소녀의 시선을 빌려 짧은 분량 안에 계급의식과 타인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놀라운 작품이지만, 이 소설에서 내 마음을 움켜쥔 장면은 끄트머리에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평화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슬픔을 자아내는 망자의 얼굴을 본 로라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늦게 돌아오는 로라를 마중 나온 오빠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끔찍했니?" 하고 동생에게 묻는다.

 

     "아니." 로라가 흐느꼈다. "그저 경이로웠어. 그렇지만, 오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오빠를 쳐다봤다. "인생이란 게,"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인생이란 게--" 그렇지만 인생이 어떻다는 것인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관이 없었다. 그는 무슨 소린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응?" 로리가 말했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떤 단어로도 포착할 수 없으나 분명 거기에 존재하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때로는 우리를 압도하고, 송두리째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키기까지 하는데도 타인에게는 결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감정에 대해서. 그런 감정은 밤의 들판에 버려진 아이처럼 인간을 서럽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밤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소설들이 있는 한, 우리는 밤이 아무리 깊어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 <다정한 매일매일>, 백수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