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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필사> 로라

mosinig 2023. 4. 6. 13:13

    H.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당신은 그를 설득해보려고 할 테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내리겠죠. 그러면 당신은 혼란스러워지고, 당신 역시 어떤 특정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이제 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도 여전히 당신과 같은 혼란을 느낍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거예요. 그 긴 여정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그곳에도 결국 해답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당신의 첫 번째 메일을 받고, 어쩐지 로라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제 저는 거의 두 달 만에 로라를 다시 만났습니다. 로라가 기계팔을 단 이후로 우리는 만나다 헤어졌고, 또 만나다 헤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모든 사건이 로라의 팔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단지, 우리 사이에 결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걸 확인해주는 하나의 사거이었을 뿐입니다.

    도저히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만나러 왔다는 말에 로라는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습니다. 그러고는 세 번째 팔로 저를 꽉 안아주었어요.

    그 팔은 여전히 차갑고 단단했으며 지독한 기름 냄새가 났습니다. 힘 조절을 못 해 부품들이 제 어깨를 찔러댔고, 공기 중으로 노출된 인공 근육이 제 뺨을 건드렸습니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감촉이었어요. 로라는 제가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세 번째 팔을 늘 포옹에 동참시켰고요. 이번에도 그랬죠.

    눈이 마주쳤을 때, 로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로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로라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깨닫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 <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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