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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필사> 밤은 책이다_01

mosinig 2023. 4. 16. 21:57

     이제껏 꽤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여전히 저는 책 읽는 속도가 특별히 빠르지는 않습니다. 빨리 습득하기는커녕, 심지어 메모를 하고 줄까지 쳐가면서 공들여 읽은 책인데도 몇 달 지나면 대강의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책읽기가 허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책을 통해 파악한 구체적인 지식의 몸체는 기억 속에 남지 않는 것 같아도, 그런 지식의 흔적과 그런 지식을 받아들여나가던 지향성 같은 것은 여전히 어딘가에 남고 또 쌓여서 결국 일종의 지혜가 된다고 믿으니까요. 

....

    "당신이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1000권의 책"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냥 당신이 읽고 싶은 책과 읽어서 즐거운 책이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시간이 걸리는 일을 단박에 해치울 수 있는 속성법이란 것도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해내는 데 세월이 필요하다면, 그건 긴 시간이 곧 그 일의 핵심이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가치 있는 것들은 대부분 결과나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 그 중요성이 놓여 있습니다. 순간순간의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면 설혹 그 결과가 끝내 내게 다가온다고 해도, 그 찰나의 지점이 뭐 그리 가치 있겠습니까.

<밤은 책이다>, 이동진

 

    몇 해 전 겨울, 고민 끝에 오래도록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습니다. 내 뜻대로 결정해서 실행에 옮겼지만, 일단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머물게 되자 이상하게 스스로가 낙오자처럼 느껴지면서 한없이 우울해지더군요. 그런데 밑바닥으로 온통 꺼질 것만 같던 시간들에서 빠져 나오게 된 계기는 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작은 일에서 생겨났습니다.

    어느 날, 쓰던 안경테가 부러져서 동네 안경점을 찾았습니다. 이전처럼 검은색이나 갈색의 뿔테 혹은 은테 안경들을 진열대에서 훑어나가는데 갑자기 빨간색 뿔테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투지 않는 안경테 몇 개를 걸쳐보며 거울을 보다가 그 빨간 테도 슬쩍 써보았어요. 거울 속의 제 모습은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새롭게 보이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곧 테를 벗어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튀는 안경테를 어떻게 써?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중학교 2학년 때 이후로 오랜 세월 안경을 써왔지만, 한 번도 평범한 안경테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어서 '왜 안 돼?'라는 반문이 스스로 들더군요. 직장까지 그만둔 상황에서 대체 누가, 무엇이 신경쓰이길래 쓰고 싶은 안경테도 못 사는가, 싶었던 것이지요. 결국 과감하게 그 안경테를 샀습니다. 그리고 제가 우울한 나날들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변화의 순간은 일종의 의식을 필요로 할 때가 많은데, 말하자면 제게 그 의식은 빨간 테 안경을 사는 일이었던 셈이지요.

    오랜 수행 끝에 인생관을 신념의 힘으로 바꾼 것도 아니고,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면서 심기일전하느라 세계일주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안경테 하나를 바꿨을 뿐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튀는 안경을 소화하는 작은 용기와 작은 의지는 곧 세상에 대한 저의 태도에 작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 작은 변화는 결코 작지 않은 또다른 연쇄적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디, 안경만 그렇겠어요. 삶에서 변화란 원래 그렇게 아주 작은 것을 바꾸는 것으로부터 찾아오는게 아닐까요.

<밤은 책이다>, 이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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